흔들리는 몸, 흔드는 스크린
안소연
유장우 개인전: 구분할 수 있는, 분간할 수 없는 / 탈영역우정국
안소연
유장우 개인전: 구분할 수 있는, 분간할 수 없는 / 탈영역우정국
어쩌다 비포장 도로 위를 달리는 버스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면서 예기치 않은 강렬한 흔들림에 맞서 저 먼 풍경의 가장자리에 시선을 꽂고 몸을 지탱시켜 본 적이 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이 불규칙한 흔들림 속에서 가까운 곳의 무언가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깜박거림 조차 잊어버린 눈동자를 심장처럼 뛰게 할 테니까. 육체에 달라붙어 있던 본다는 행위가 이처럼 곤경에 빠져버렸으니 저 먼 데에 밧줄을 걸고 갈 곳 없는 응시를 한 점에 가져다 놓는다. 바라 보기의 지연, 즉 이 유보된 응시는 흔들리는 몸을 떠나 바위 같은 먼 데의 한 점에 사로잡혀 스스로 여전히 무언가 보고 있다는 허위를 만들어낸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육체는 보고 있음을 연기하는 응시에 안도하며 알 수 없는 울렁거림과 뒤틀림에 복종하는 불가피한 몸이 된다.
진동, 그것이 눈의 감각에 와 닿은 것인지 귀의 감각에 와 닿은 것인지 아니면 내 몸 스스로의 흔들림 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모호한 진동이 나타나있다. 유장우의 ⟪구분할 수 있는, 분간할 수 없는⟫에서, 우리가 처음 마주하는 것은 바로 이 흔들림 일 테다. 모호하지만 강렬한 이 진동은 비포장 도로 위의 버스에 올라탄 육체를 떠올리게 할 만큼 우리 몸에 간섭해 들어온다. <집중의 프로토콜>(2020)은 다섯 개의 영상으로 구성된 설치 작업으로, 커다란 스크린이 희미한 동선을 그려내면서 움직이는 퍼포머들의 신체를 정지된 카메라로 촬영한 듯한 영상을 송출하고 있다. 그래, 연극 무대와도 같이 거의 비어 있는 공간에서 하나 혹은 넷의 신체가 보여주는 거의 침묵에 가까운 행위와 동작을 고정된 카메라가 기록하여, 그렇게 아무런 기교 없는 영상을 스크린에 흘려 보내고 있다는 인상이 왠지 강하다. 다만, 지금 그 화면이 너무 흔들리고 있다는 것. 그것과 나 사이에 커다란 흔들림이 있다는 것. 우리는 화면 속의 인물들이 보여 주는 숱한 행위와 이 알 수 없는 진동을 결코 구분하지 못하고 심장처럼 흔들리는 응시를 가져다 놓을 만한 먼 데를 찾게 될 것이다.
유장우는 연기를 전공한 퍼포머 4명에게 부주의 상태에 대한 사례 기록을 해석하여 연기하도록 의뢰했다. 그는 사회 질서 안에 내재되어 있는 “집중”에 대한 강박적 요청과 승인의 함의를 살피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일탈적 행위로서 “부주의”에 주목했다. 말하자면, 집중과 부주의가 단지 흑과 백의 바둑알처럼 쉽고 선명하게 구분되어 보이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상태에서 둘의 필연적인 간섭과 역설적인 행위의 닮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유장우는 그 둘의 중첩과 간섭에 주목하면서, 결국 일련의 카메라가 시도했던 관찰자의 시점에서 “지각”의 주체가 되풀이하며 경험하게 되는 집중과 부주의의 역설적인 상태를 탐색한다. 그런 의미에서, <집중의 프로토콜>은 말 그대로 집중을 작동시키는 시스템의 규약을 생각하게 하는데, 그 숨은 함의에 있어서는 “(부주의 상태에 대한) 집중의 프로토콜” 혹은 “(부주의를 만드는) 집중의 프로토콜”이라는 반전을 동시에 환기시킨다.
네 명의 퍼포머가 같은 장소에서 부주의를 연기하는 영상 하나와 각각의 퍼포머가 홀로 부주의 상태에 있음을 연기하는 영상 네 개가 크기와 방향을 조금씩 달리 하며 한 곳에 있다. 그런 까닭에, 다섯 개의 영상은 적절한 동선을 그리며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서로를 간섭하여 누군가의 집중을 거스르는 혼란을 가시화 하고 있다. 퍼포머들의 행위는 대략 무엇인지 가늠할 만하다. 예컨대,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이의 화면은 불안과 긴장을 보여준다. 깊은 심호흡으로 시작하는 퍼포머의 행위는 무언가에 집중하려는 듯 자신의 육체와 시선을 끊임없이 흔들고 움직이며 그 부주의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는 것 같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몸을 체조로 이완시키며, 눈동자를 다른 데로 잡아당기면서, 그는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집중시키기 가능한 순간을 위해 스스로 이 극단적인 부주의 상태에 몸을 팽창시켜 놓고 있다. 영상 중간쯤에 이르러 “봤어?”, “해야만 하는데”, “모르겠는데”라는 짧은 대사를 연습하기 시작하는 퍼포머는, 필사적으로 몸을 흔들어 마치 해체하려는 망상에 사로잡힌 듯 단지 몇 초의 연기에 완벽하게 몰입하기 위해 과도한 편집적 행위를 일삼는다.
<집중의 프로토콜>로 묶인 또 다른 영상에서는, 교복을 입은 퍼포머가 몇 개의 물건을 사용해 부주의 상태를 진지하게 연기하고 있다. 책상에 책을 펴놓고 공부에 집중하지 못해 그 주변을 계속해서 배회하고 있는 몸의 소소한 움직임들은 문득 강박적인 병리 상태를 보여준다. 규칙적인 소리를 내면서 손톱을 깨물고, 손으로 펜을 돌리며 다리를 떤다. 책에 밑줄을 긋다가 강박적인 줄긋기의 행위로 이어지고, 볼펜을 쓰기 위해 버튼을 누르다가 계속해서 그 행위에 빠져 허공에 강박적인 소리를 만들어내는 볼펜 누리기에 몰두해 버리는 식이다. 부주의한 행위의 반복, 퍼포머는 아주 순간적인 그것의 병리적 몰입을 보여준다.
이때, 유장우는 일련의 부주의를 연기하는 퍼포먼스를 매개로, 집중과 부주의 상태 간의 연쇄 작용을 전시 경험에 까지 끌어들인다. 이는 그가 과거에 <믿음과 현실>(2019)에서 취했던 태도와도 맞닿아 있어서, 각기 다른 행위, 즉 사회적 행위-퍼포머의 행위-관찰(카메라) 혹은 관람(시청)하는 행위 및 경험의 연쇄 작용을 충분히 가늠케 한다. 전시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2019년의 전시 ⟪주의 깊게 보지 마시오⟫(2인전)를 통해 사회에서 강요되고 있는 “집중력”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과 그와 연쇄되는 전시 경험에서의 관객 몰입 혹은 분산에 대한 복합적인 접근과 맞닿는다. 따라서, 그는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본유적인 “지각” 경험에 대해 새삼 질문하는 듯 하다. 나와 너, 이 (영원한) 상대적 자리에서 지각 경험의 경계를 의심하며 재배치하려는 시도를 (무모할 정도로) 감행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나름 통제된) 지시대로 연기하는/연기해야 하는 퍼포머들의 행위처럼, 일련의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조율하는 창작자-기획자의 역할을 그럴 듯하게 수행한다. 이때 그는 영상을 편집하고 사운드를 조정하는 등 일련의 기술적 편집 과정을 수반함으로써, 이 지각의 과정을 통제 혹은 조율하는 보이지 않는 (그의) 위치를 상상케 한다. [그것을 눈치 채는 일은, 또 다시 연쇄하여, 이 전시에 대한 부주의한/일탈의/실패한 태도를 명백히 드러내는 걸까.]
다시, 공간의 동선이 시작되는 입구로 돌아와, 빠뜨린 경험에 대해 말해보자. 흔들리는 몸, 부주의를 연기하는 몸에 대해 지각했던 경험은 사실 스스로 진동을 일으키고 있는 스크린에 대한 지각과 교차한다. 응시를 지탱하기 위해 고정되어 있어야 할 화면의 흔들림은 거침없는 영상 편집의 효과와 중첩돼 스크린 자체의 부주의를 노골적으로 극대화 한다. 이를테면, 깊은 심호흡으로 시작했던 퍼포머의 행위가 한 순간의 완전한 몰입을 위하여 육체의 부주의를 극단적으로 감행했던 연기 장면을 다시 기억해 볼 때, 그 흔들리는 몸을 매개했던 스크린의 떨림을 혹은 아주 예외적인 끊김을 다시 크게 부각시켜 보자.
수직으로 길게 서 있는 스크린은 그 뒤에 부착된 진동 모터의 힘으로 진동을 일으키며 지속적으로 흔들리는 상태에 고착되어 있다. 퍼포머의 부주의해 보이는 산만한 행위의 지속이 사실 어떤 한 순간으로의 몰입을 기다리며 끊임없이 집중을 시도하고 있는, 그러니까 그 자체로 이미 “어떤 집중”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역설적인 행위라는 것일 텐데, 또한 그것을 연기하고 있는 퍼포머의 육체 또한 부주의 상태(의 연기)에 집중하고 있음은 당연할 테고, 게다가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 행위의 장면을 담아내고 있는 스크린 지지체가 그 행위에 상응하는 진동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스크린의 진동이 (당연하듯) 지각의 분산을 초래함과 동시에 부주의 상태에 빠져 있는 저 행위로의 몰입을 돕는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VR 및 4D 극장 체험 같은 것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마치 흔들리는 버스에서 몸 안의 통제할 수 없는 울렁거림 탓에 응시를 먼 곳에 고정시켜 놓으려는 반사적인 행동처럼, 응시를 방해하는 스크린의 흔들림은 되레 우리의 응시에 미세한 착시 혹은 교란을 일으켜, 스크린과 나의 관계에서 고정된 스크린 대신 고정된 나(관객)로의 전복과 이에 상응하는 응시의 전복 또한 불러온다. 다시 말해, 스크린의 흔들림을 고정시켜 줄 응시의 목표점이 “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부주의한 상태에 놓여 부주의를 경험하기 위해 엄격한 집중의 순간을 감행해야 하는 역설적인 행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한 가지 더 집중해서 살펴봐야 할 것은 영상 편집에 있다. 앞서 나는 이 스크린 위의 영상들에 대하여 “아무런 기교 없는 영상”으로서 고정된 카메라의 관찰자 시점에 대해 추측해 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사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느낄 때) 좀 억지스럽다. 스크린의 진동부터가 이미 관객을 부주의의 교란 상태에 빠뜨릴 만큼 매우 스펙터클한 경험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영상의 번쩍거림은 단지 모터의 힘이 만들어낸 진동 때문만은 아니고 영상 편집에 의해 갑작스런 화면 이동과 순간적인 끊김이 응시의 부주의와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기교 없음을 말했던 것은, 영상 편집에 있어서 작가가 숙련된 기술 대신 노골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거의 고정돼 있었던 게 맞는 것 같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퍼포머들의 연기를 각각의 시점에서 촬영했고, 유장우는 이 촬영본 영상을 가져다가 다시 5분 내외의 편집 영상을 만들었는데, 퍼포머들의 연기를 관찰하는 시점에서 그들의 역설적인 수행적 행위를 쫓아 몰입하면서 자신이 경험했던 급격한 시선의 변화를 편집에 그대로 적용해 드러낸 것 같다. 이를테면, 퍼포머의 몸이 방향을 바꿀 때 그 방향의 전환을 화면의 전환과 즉각적인 이어 붙임으로 거칠게 표현했다든가-이 거침은 편집의 효과만은 아니고 스크린의 진동과 동시에 작용한다- 화면 확대나 이동을 통해 시점 변화를 분명히 지각하도록 편집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역설적이긴 하나, 편집된 이 화면과 마주한 순간에도 관객의 몸과 응시는 고정될 것을 은밀히 강요 받는다.
그렇다면, 소리는. 마치 진동처럼 공간 전체를 메우고 있는 이 소리의 정체에 대해 생각해 보자. 퍼포머들의 부주의 상태를 연기하는 움직임과 편집된 화면의 움직임과 스크린의 흔들림이 서로 긴밀하게 교차하면서 결국에는 일련의 관객의 몸이 지각하는 경험을 최종적으로 판단하게 하는 유장우의 <집중의 프로토콜>에서는, 소리가 매우 중요하다. 그는 퍼포머들이 만들어내는 부주의한 산물의 소리들을 더욱 증폭시켜 그것으로 병리적인 사운드 효과를 발견해낼 뿐 아니라, 그 소리의 물성이 스크린의 진동과 화면 편집의 거친 질감과 교차해 신체적으로 지각해낼 수 있는 진동의 폭을 더욱 가중시킨 셈이 됐다. 말하자면, 볼펜을 강박적으로 누르는 소리는 퍼포머가 부주의 상태를 연기하며 만들어낸 몸의 움직임의 결과이며, 그 소리의 증폭이 물리적인 진동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증폭된 소리가 고정되어 있어야 할 스크린이 스스로 흔들림을 갖도록 동력을 제공한 것이다. 일련의 연쇄 작용이 결국 관객의 지각에 의해 경험되면서, 부주의한 상태가 구축한 과도한 흔들림의 상태에서 그것이 교란시키는 단순한 응시에서 벗어나 현상학적 지각의 역량을 관객은 도전 받게 된다. 물론 대부분이 응시의 교란에 사로잡혀 결국 볼 수 있음을 포기하고 말 테지만.
그런 의미에서, <피나고, 알배기고, 이갈리고>(2020)의 영상도 <집중의 프로토콜>과 같은 맥락의함의를 보여준다. 군대 사격 예비 훈련 중 PRI(Preliminary Rifle Instruction)훈련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이 작업은, 특정 사격 자세를 훈련하기 위해 총구 위에 바둑알을 올려 놓고 그것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집중력을 테스트하는 훈련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특히 이 훈련이 단지 집중력을 훈련하는 행위이기 보다는 바둑알을 떨어뜨렸을 때의 실패에 대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 집중력을 강요 받았던 훈련으로 인식하면서, 집중력을 강요하는 사회의 병리적 불안에 대해 살피고 있다. 영상 속 거의 정지된 화면에 가까울 정도로 고정된 장면에서는, 흰색 바둑알이 멈춰 있는 총구 위에서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으며 그것과 교차하는 벅찬 호흡 소리가 화면의 진동을 더욱 배가시키고 있다. 따라서, 그 불안한 흔들림을 감수하고 인내하며 내내 바라봐야 하는 관객의 몸은 집중과 부주의의 경계에서 현상을 지각하는 변증법적인 신체로 작동하게 된다. 흔들리는 몸과 흔드는 스크린 사이에서 일어나는 응시와 지각의 역학을 넘어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