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즘 예술은 가능한가
이민지
이민지
유장우의 작업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불안한 질문에 다가간다.
‘리얼리즘 예술은 가능한가.’
유장우는 2022년 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의 작업 <너의 실패는 나의 미래>에서 소란을 무대에 올렸다. 여러 채널의 모니터에는 입과 얼굴이 말을 하고, 그 다 채널의 모니터들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퍼포머, 모니터 속 입과 얼굴의 실제 인물들 역시 또 많은 말들을 쏟아내는 소란이다. 작가가 트위터, 유튜브, 각종 기사와 강연, 보고서 등에서 자본과 경제에 관한 말과 텍스트들을 수집해 극작가와의 협업으로 대본을 만들었고, 이를 다시 퍼포머들이 각자의 경험과 감정에 따라 스코어를 만들어 제작한 전시/퍼포먼스다. ‘비트 코인, 인플레이션, 유가상승, 우크라이나, 지속가능, 에너지 솔루션, 예측, 화성’과 같은 익숙한 단어가 툭툭 떨어진다. 이 무수한 말들은 모두 바로 우리의 현재를 가득 채우고 있는 말들이다. 현실을 지탱하고 있는 말들이다. 하지만 반복하거나 고함치거나 우물대거나 다른 말에 묻히는 이 말들은 애초부터 전달을 목적에 두지 않아 보인다. 스코어가 된, 어렴풋한 의미를 헐겁게 감싼 소음의 덩어리로 굴러 떨어질 뿐이다.
나는 여기서 이 현실의 말들이 한데 엮이면서 도리어 포착할 수 없게 멀어지는 현실을 본다. 우리의 현재를 지탱하고 있는 현실의 말들의 실체 없음을, 이 묵직한 소음의 덩어리가 전시장을 빠져 나가는 순간 사라질 것임을, 그러니까 사실 현실은 이미 그렇게 무너져 있는 채였다는 것을 목격하고 만다. 이 말들의 허무함에는 그 어떤 유감도 없다. 단지 팩트라든지, 윤리 같은 것들에 아랑곳없이 쏟아지는 말들이 실제로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목격한다. 생각이, 상상이, 불안이, 노여움이, 괄시와 시샘이, 자괴가 계속 실재하는 세계를 조직하고 재조직하고 또 다시 조직해서 굴려나가고 있다는 사실. 정말로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작가는 무대 위로 올린다.
독일의 신예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새로운 리얼리즘’을 떠올려보자. 그는 세상이 우리가 보는 세상과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하는 형이상학과 우리가 보는 것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환상에 사로잡혀있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구성주의의 낡음을 비판한다. 도리어 세계는 사건, 사건을 바라보는 A씨와 B씨, 사건을 보지 않은 C씨, 사건 자체 등 무수한 개별의 사실들이 맞물리고 얽힌 세상이라고 강조한다. 곧 가브리엘이 제안하는 ‘새로운 리얼리즘’은 무수한 개별 사실들이 존재하는 방식에 있다. 구성되거나 주체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 아닌 실재하는 복수의 의미들에 관한 것이다. 단일한 존재 방식이나 의미장으로 환원될 수 있는 세계란 결코 없다. 유장우는 이 작업에서 병리적으로 내제된 감정, 개인화 되지 않은 개인의 욕망과 희망, 이를 작동시키거나 작동 불가능하게 만드는 여러 말들의 기제들을 반복, 굴절, 패씽시키며 독해할 수 없는 세계의 실재를 드러낸다. 세계를 비판하고 틈을 내길 요청하던 리얼리즘 예술을 갱신하며 유장우 역시 새로운 리얼리즘을 제안한다.
유장우의 퍼포머티브적인 프리젠테이션 방식에 대해서도 짚어보자. 유장우는 전시와 퍼포먼스를 겹치는 전략을 취해왔다. 전시가 일정한 기간 동안 일정한 장소를 점유해서 비교적 자유로운 입퇴장을 용인해 관객을 맞이한다면, 퍼포먼스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제시하고 관객을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시킨다. 관객의 존재는 작품이 작동하는 데에 주요 요소가 된다. 관객이 부재할 때에도 영상의 플레이를 비롯해 작품이 유효하게 유지되는 전시와는 다른 방식이다. 그리고 ‘몸’들이 있다. 유장우의 전시와 퍼포먼스의 겹치는 전략은 그의 작업을 완전히 전시만으로도, 또는 완전히 퍼포먼스만으로도 볼 수 없도록 한다. 전시라는 바탕 위에 퍼포먼스의 사건이 각기 발생한다.
2020년 탈영역우정국에서 선보인 전시 《구분할 수 있는, 분간할 수 없는》의 중심 작업인 <집중의 프로토콜>은 연극 무대를 연상케 하는 장소에서 퍼포머들이 ‘집중’을 위한 습관, 행동을 반복적으로 연기하도록 한다. 이렇게 촬영된 영상은 5개의 스크린에 투사되는데, 스크린 후면에는 스크린 자체를 진동케하는 센서를 달아 스크린이 스스로 진동하게 한다. 영상을 받쳐내는 지지체 자체가 영상의 사운드에 반응해 지속적으로 진동하는 것이다. 여기서 작가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데, (아마도 여러 선택지의 하나였을지도 모르는) 영상의 데이터가 흔들리는 게 아니라, 영상을 지지하는 스크린을 물리적으로 움직이게 한 것이다. 관객은 작업을 보는 동시에 집중을 위한 신체의 움직임(눈을 깜빡거린다던지, 어지러움을 느낀다던지)을 즉각적으로 동반한다. 작업은 흔들리는 영상이 아니라 진동하는 공간으로 제법 정직하게 확장한다.
앞서 소개한 <너의 실패는 나의 미래> 퍼포먼스의 배경음악으로 적용된 또 다른 작업, <미래없음 : 실재적이면서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노래>는 주식시장의 변동성에 대한 ‘공포지수’로 지칭되는 빅스 지수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곡한 노래다. 일정 기간의 빅수 지수 데이터를 기반으로 값이 올라갈수록 크게; 크레센도, 일주일 중 첫 날의 다이나믹에 따라 ‘아’, 혹은 ‘하’ 등의 규칙으로 작곡되고 가사를 붙인 노래다. 이미 무척 분절적인 이 노래는 <나의 실패는 너의 미래>의 말들을 뭉개버리며 ‘실재적이면서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코러스로 작동한다.
글의 서두에서 떠올린 질문, ‘리얼리즘 예술은 가능한가’는 여전히 불안하다. 예술보다 더 리얼하게 암울한 세계에서 ‘리얼리즘 예술이 필요한가’라는 절망적인 질문이 잇따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스크린 바깥, 실재하는 (전시) 공간에서 만나는 이 새로운 리얼리즘은 또 다른 ‘동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