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짓

김남시

이화여대 예술학

유장우 작가 작업의 중심에는 ‘몸짓’이 있다. 몸짓이란 몸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움직일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기에 그 몸으로 행해지는 것은 또한 움직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하면 몸이 행하는 모든 움직임들을 같은 것으로 보는 오류에 빠진다. 그렇지 않다. 우리의 몸은 움직이기도 하지만 또 움직여지기도 한다. 이 구분은 자신의 의지로 팔을 들어 올리는 경우와 뜨거운 물건에 손이 닿았을 때 반사적으로 손이 움추려드는 경우의 차이에만 있지 않다. 내 몸의 일부를 의지적으로 움직일 때 그 몸의 다른 일부는 그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여지기도 한다. 팔을 위로 움직일 때 손은 의지와 상관없이 함께 위로 움직여진다. 의식적으로 다리를 움직여 어디론가 걸어갈 때 우리 팔은 저절로 그에 맞추어 움직여진다. 이렇게 보면 춤을 추는 사람에게서 움직이는 몸과 움직여지는 몸을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춤을 추는 자의 몸은 움직이는 동시에 움직여진다. 모든 몸짓에는 이처럼 움직이는 몸과 그와 더불어 움직여지는 몸이 함께 있다.

<99 Luftbaloons>

노래를 부른다는 건 매우 복잡한 몸짓이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많은 부분들을 움직여야 하고 또 동시에 많은 부분들이 움직여져야 한다. 어떤 것이 움직이는 것이고 어떤 것이 움직여지는 것인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목소리를 내려면 목청이 울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목청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일까 아니면 움직여지는 것일까. 입과 입술, 혀가 적절하게 움직여야 소리가 음절이 되고 가사를 리듬에 맞게 발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벌어졌다 닫히는 입, 가사를 발음하기 위해 그때마다 다르게 움직이는 혀와 입술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일까 아니면 노래의 가사와 리듬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일까? 노래를 부르는 동안 이루어지는 호흡은 또 어떤가? 숨을 쉬는 것은 나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노래를 부르는 동안 어느 순간 숨을 들이 마시고 언제 숨을 내쉬는지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 노래의 가사이고 그 노래의 리듬이 아닐까?

유장우 작가의 <99 Luftbaloons>는 우리 몸짓이 갖는 이 복합적 사정을 예시해주는 작품이다. 여기서 작가는 마이크가 달린 카메라를 입에 넣고 니나의 <99개의 풍선>을 노래한다. 여기서 카메라와 마이크를 조정하는 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움직이는 혹은 움직여지는 입이다. 카메라가 향하고 있는 노래방 화면은 입이 닫혔다 열림에 따라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한다. 마이크는 노래가 진행됨에 따라 계속 움직이고 또 움직여지는 혀와 입술, 울리거나 울려지는 목청에서 나오는 소리를 둔탁하고 분절적으로 들려준다. 노래를 부르는 몸짓에 연루되어 움직이고 또 움직여지는 혀와 입술, 그가 없다면 도대체 노래를 부를 수 없는 혀와 입술이 귀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노래가 바로 이렇게 들렸으리라.

노래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그 소리를 ‘온전히’ 들려주기 위해서라면 마이크와 카메라는 노래하는 몸의 외부에 위치했어야 했다. 우리가 누군가가 말하는 몸이나 노래하는 몸을 온전히 보고 들을 수 있는 건 우리 자신이 말하거나 노래하는 몸짓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몸짓은 그 바깥에 있는 자에게만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몸짓이 이루어지는 한 가운데, 곧 몸짓의 내부에 위치한 카메라 겸 마이크는, 노래하는 입술과 혀처럼 그 몸짓에 연루되어 함께 움직이느라 몸짓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흥미로운 건 여기서 카메라 겸 마이크가 몸짓을 기록하고 녹음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스스로 몸짓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눈 앞에서 볼 수 있는, 움직이고 움직여지는 몸을 퍼포머라 부른다면 그 카메라/마이크는 퍼포머의 한 부분으로 움직여지는 비인간 에이전시다. 그 덕분에 우린 몸짓의 내부를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

<174Cm 오브젝트>, <키 크기 프로젝트>, <김봉희 여사의 키크기 체조법>

독일 유학을 떠나기 전 작가는 자신의 키를 일련의 작업소재로 삼았다. 자신보다 키가 큰 모델의 키를 자신과 같게 만들기 위해 그 모델이 서 있는 땅의 흙을 파내거나, 자기보다 큰 사람들의 키를 잘라내기도 했다. 방문한 친구 집에 있는 물건들을 쌓아 자기 키 높이의 임시 구조물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제스쳐는 퇴행적이다. 친구의 물건으로 자기 키에 해당하는 구조물을 쌓는 행위는 마치 항문기 유아가 자신의 변에 대해 갖는 태도와도 유사하다. 만족을 위해 외부세계가 필요하지 않던 유아기의 원초적 나르시즘으로 퇴행함으로써 자아는 현실원리 앞에서 거절된 리비도를 위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업들에는 이후 작가 작업의 중심 테마로 떠오를 몸의 문제가 맹아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몸이 우리 의지나 정신의 도구라 생각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몸은 우리를 배신하거나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고, 우릴 절망에 빠뜨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나의 몸, 나의 키는 내가 원하는 만큼 커주지 않는다. 나는 내 몸에 다름 아닌 나의 키를 내 의지대로 키울 수 없다. 키는 커지는 것이다. 내 몸의 일부인 키에 대해 우리는 매우 수동적이 된다. 큰 키를 선호하는 우리 시대의 문화는 키를 ‘키우기’ 위한 수술이나 약물 등의 수단들도 고안해 냈다. 스스로 크는 대신 커지는 키 혹은 커져야 한다고 여기는 키와 그를 위해 투입되는 온갖 인위적 수단들. 여기에는 움직이는 동시에 움직여지는 몸의 양가성, 그리고 그에 대한 우리의 복잡한 관계가 오롯이 함축되어 있다.

<불만연구>

움직이고 움직여지는 몸짓, 눙동적이면서 수동적인 몸의 양가성은 <불만연구>에서 사회적 층위로 확장된다. 주지하듯, 1911년 출간된 테일러의 <과학적 경영의 원리 Principles of Scientific Maganement>)와 같은 해 출간된 길브레스의 <동작연구 Motion Studies>는 노동과정을 표준화, 효율화시킴으로써 근대 자본주의 경영관리의 토대가 되었다. 길브레스의 <동작연구>의 부제는 ‘노동자의 효율성을 증가시키기 위한 방법 A Method for Increasing the Efficiency of the Workman’ 이었다. 여기서 효율성이란 기존 노동동작에서 ’불필요한‘ 것을 없애고 더 짧은 시간에 더 높은 생산성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동작을 효율화시킨다는 건 각 노동자들이 각자 습관에 따라 행해오던 동작의 편차들을 줄이고 표준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표준화-효율화된 동작에 맞게 작업을 세분화하고 그를 위해 작업장 구조를 개선함으로써 각 개인이 과거의 삶에서 길어온 몸짓들은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동작연구를 위해 길브레스는 특별한 공간을 조성했다. 동작의 크기와 방향을 측정할 수 있도록 벽면에는 그리드를 그려 넣고 동작에 걸린 시간을 계산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한 초시계도 장착되었다. 길브레스는 에티엔 쥴 마리 Etienne Jules Marey가 개발한 크로노포토그래피를 사용해 노동동작을 촬영했는데, 그 결과 형광띠를 단 노동자의 손 움직임이 연속적인 선과 곡선들의 시각적 흔적으로 남았다. 쥴 마리의 크로노포토그래피와 그를 활용한 길브레스의 동작사진을 통해 인류는 완전히 새로운 ‘운동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이전까지 움직임의 재현은 움직이는 신체나 물체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었다. 움직임을 시각화하기 위해서는 움직이는 신체나 물체를 함께 재현해야 했다. 그런데 이 동작 시각화 기술은 움직이는 신체로부터 그 신체를 제거하고 움직임의 흔적만 시각화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적어도 시각 영역에서만큼은 ‘몸’과 그 몸이 하는 ‘짓’(움직임)이 분리될 수 있게 되었다.

유장우 작가의 <불만연구>는 길브레스의 동작 시각화 방법을 그대로 이용한다. 그리드가 그려진 벽 앞에 손에 형광 띠를 단 점원, 컴퓨터 프로그래머, 큐레이터, 비서, 요리사, 큐레이터 등의 직업인들이 앉고 그들의 움직임을 촬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카메라 앞에서 이들이 행한 건 일하는 동작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직업과 생활영역에서 생겨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는 동안 움직이는/움직여지는 그들의 몸(손) 동작이 길브레스가 고안한 방법을 통해 시각적으로 기록되었다. 노동동작을 효율화, 표준화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시각화 형식을 노동과정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몸짓을 시각화하기 위해 전유한 것이다. 전유의 전략을 채택하는 작업은 통상 그렇게 전유한 방법의 모순이나 문제를 역설적으로 폭로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유장우 작가의 작업은 그렇지 않다. 일하는 사람들의 동작은 그 일의 종류에 따라 거의 표준화되어 있을 것이다. 그 표준화는 길브레스의 선구적 연구 덕택이다. 점원이 일하는 슈퍼마켓 계산대나 비서가 앉는 의자와 책상의 높이, 주방 요리대의 설비나 프로그래머 책상에서 컴퓨터의 위치 등이 지금처럼 정해진 데에는 동작연구에서 출발된 산업공학적 개량과 혁신이 큰 몫을 했을 터. 바로 그를 통해 그들의 일하는 몸짓은 효율적 방식으로 표준화되어 길들여진다.

그렇다면 불만을 쏟아놓을 때 사람들의 몸짓은 어떨까? 불만의 몸짓은 표준화된 몸짓에 의해 억압되어 있던 무엇인가를 드러낼 것이라는 기대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낡은, 인간의 몸짓과 관련해서는 그저 낭만적이기만 한 관념에 근거한다. 인간의 몸짓에는 어떤 것이 ‘자발적, 자연적’ 움직임이고 어떤 것이 ‘외부에 의해 길들여진 수동적 움직임’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착종되어 있다. 우리의 걷는 몸짓은 자연적인가? 하지만 걸음은 걸을 수 없던, 이전 몸짓 위에 덧씌워진 학습과 훈련의 결과가 아닌가? 인간 몸짓에서 ‘원초적’ 혹은 ‘자연적’이라 말할 수 있는 건 생물학적으로 조건 지워진 반사운동 외에는 없다. 다른 모든 몸짓은 일정한 학습, 훈련, 습관의 산물이다. 동작표준화 이전 노동자들의 동작은 효율성에 따라 표준화된 동작과 마찬가지로 ‘자발적이거나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몸짓의 ‘자연성’과 ‘비자연성’을 구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의 몸짓이 어떠한 사회, 정치, 기술적 힘과 조건들 속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불만연구>는 불만의 몸짓이 사실상 노동의 몸짓을 거의 반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 몸짓이 처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믿음과 현실>

이 작업은 여러 겹의 레이어와 복잡한 단계를 거쳐 구성된다. 출발점은 19세기 후반 시작해 20세기 초까지 진행된 독일의 타이포그래피 논쟁이다. 독일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흐름과 글로벌리즘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안티쿠바와 프락투어라는 두 타이포그래피를 매개로 표출되었다. 언뜻 사소해보이나 그렇지 않다. 타이포그래피는 어떤 주장과 사상, 이데올로기가 전달되고 유포되는 시각적 형식이다. ‘매체가 메시지’라는 맥클루언의 말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쓰여진 생각이나 사상이 그것이 인쇄된 서체와 구별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어떤 타이포그래피를 사용하는가는 그를 통해 전달되고 유포되는 이념, 사상, 이데올로기의 시각적 인상을 결정짓는다. 예를 들어 나치 구호를 인쇄하던 타이포그래피에 다른 내용이 담겨도 ‘나치즘’의 인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어떤 내용을 어떤 타이포그래피로 인쇄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 배후에는 정치적 정체성을 둘러싼 사정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업은 먼저 “Belief”와 “Reality”라는 두 단어의 철자 13개를 안티쿠바와 프락투어로 “쓰는” 것에서 시작한다. 작가는 여기에 두 번째 레이어를 추가한다. 뒤러의 책 <측정의 교육 Unterweisung der Messung>(1525)이다. 이 책은 독일어로 쓰인 최초의 기하학 서적으로 여기서 뒤러는 나선, 파스칼 리마송, 타원, 포물선, 쌍곡선 등과 탄젠트 함수 등을 정확히 그리는 방법을 소개한다. 뒤러는 이 기하학적 방법을 안티쿠바와 프락투어 타이포그래피를 그리는 데도 적용하는데, 작가는 여기서 위 13개의 철자도식을 가지고 온다. 이로써 13개의 철자는 각 두 개의 타이포그래피 도식을 얻는다. 그 다음 작가는 각 철자의 두 도식을 서로 겹쳐 하나의 그래픽을 만들고 그를 바닥에 투사한다. “Belief”와 “Reality” 두 단어 철자가 모두 13개이니 도합 13가지 서로 다른 그래픽이 바닥에 2분씩 투사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퍼포먼스는 이 복잡한 사전작업에 근거해 있다. 작가는 두 명의 퍼포머에게 각기 서로 다른 타이포그래피 도식에 맞춰 움직이라는 지시를 내린다. 곧 한 명은 안티크바 타이포그래피 도식, 다른 이는 프락투어 타이포그래피 도식을 좇으며 움직인다. 또 다른 규칙은 서로의 신체를 접촉하지 말라는 것이다. 두 신체가 접촉하면 그러지 않을 때와는 다른 동작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외 모든 동작과 몸짓은 전적으로 퍼포머의 재량과 해석에 맡겨진다.

이 작업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건 퍼포먼스가 시작되기 전 까지 이루어진 사전작업의 복잡성과 퍼포먼스의 자유도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혼종이다. 사전작업의 성격은 다다적이다. ‘Belief’라는 단어는 B, E, L, I, E, F 의 철자들로 해체되고 그 철자는 다시 두 타이포그래피로 나뉘며, 그건 또다시 뒤러의 도식을 거쳐 추상적이고 기하학적 도형들의 그래픽이 된다. 그건 마치 움직이는 몸은 사라지고 그 움직임의 흔적(‘짓’)만 시각화한 쥴 마리/길브레스의 사진 같다. 이 작업의 출발점이었던 타이포그래피는 어떤 사상, 이데올로기, 이념, 곧 “믿음 Belief”을 형성하고 전파함으로써 “현실 Reality”의 사회, 정치적 힘을 발휘하게 하는 매체였다. 그런데 여기서 그 ‘믿음’과 ‘현실’은 의미론적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분해되고 해체되어 기하학적 도형으로 추상화된다. 다다이스트 라울 하우스만은 의미를 갖는 단어를 철자로 해체하고 그마저 우연적으로 배치해 시를 지었다. 이는 당대의 모든 의미연관들을 전복시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려는 급진적 탈의미의 제스쳐였다.

<믿음과 현실>의 퍼포먼스는 이렇게 해체되고 추상화된 기하학적 그래픽 위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퍼포머는 1) 각 타이포그래피 도식의 라인을 따라야 하는 규칙, 2) 사실상 동일공간에 ‘착종’될 수 밖에 없는 다른 퍼포머의 신체와 접촉하지 않으면서 상호작용하는 힘의 벡터 속에서 움직인다. 이 규칙과 힘은 일정한 사회, 정치, 기술적 힘과 조건들 속에 위치할 수 밖에 없는 몸짓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속에서 행해지는 퍼포머의 몸짓으로부터 무엇이 생겨날 것인가? <믿음과 현실>이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이다. 이는 사실상 다음 두 번째 질문을 함축하고 있다. 해체되고 추상화되었지만 여전히 움직임을 제한하는 과거의 폐허 위에서 몸짓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