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이미지를 조회하기 : 전시 <너의 실패는 나의 미래>에 관하여
서동진
서동진
독일의 급진적 예술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서푼짜리 오페라>의 후속작이라 할 <서푼짜리 소설Threepenny Novel/Dreigroschenroman(1934)>이란 장편을 쓴 바 있다. 그의 유명한 극작의 명성의 그늘에 가려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오늘 우리가 처한 정황을 새기자면, 이 소설은 더 없이 흥미로운 점을 품고 있다. 다른 작품들을 쓸 때와는 달리 이 소설을 쓰는 와중에 브레히트는 여간 애를 먹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푼짜리 소설>에서 브레히트의 야망은 시카고의 선물(先物, futures) 시장에 관한 이야기를 쓸 작정이었다(결국 완성된 소설은 영국의 유명한 소매체인 거물의 이야기로 낙착된다). 선물이란 특정한 상품(밀, 석유, 돼지고기 등)의 미래의 가격 변동에 내기를 거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올가을에 수확할 밀의 부셀 혹은 톤 당 매입 가격을 미리 흥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산 가격보다 밀 가격이 내려가면 투자한 이는 손해를 보겠지만 그보다 많이 오르면 큰 횡재를 하는 셈이다. 이는 언뜻 보면 도박처럼 보이지만 우여곡절 끝에 어엿한 금융 활동 가운데 하나로 인정도 받고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지난 2018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위기의 정점으로 알려졌던 미국 발 금융위기가 발발했다. 그것은 선물시장에서 비롯된 이른바 파생상품(derivatives) 시장에서 비롯되었다. 브레히트가 매섭게 지켜보던 그때만 하더라도 시카고 선물거래소는 물리적 실체를 갖춘 상품에 기초한 선물을 거래했다. 그러나 브렌트우즈체제가 붕괴된 직후인 1972년, 시카고 선물거래소는 통화(通貨) 선물거래를 개시했다. 금융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는 실재하는 물리적 재화가 아니라 훗날의 통화 가치의 변동이라는 순전히 허구적인 대상을 거래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화폐 가치의 변동이 초래할 리스크를 ‘회피(hedge)’할 수 있도록 한다고 짐작되는 가상의 약속이 거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는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을 기술적으로 창조한 것이라는 번드르르한 변명과는 달리 순전히 돈이 자신의 힘으로 불어나는 환상을 쫓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흔히 금융화(financialization)라고 부르는 동시대의 자본주의는 가늠할 길 없이 비대한 금융의 지배를 초래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술에 무슨 상관이란 걸까. 브레히트는 그것이 큰 상관이 있다는 걸 직감한 드문 예술가였다. 그는 법인자본주의의 부상, 그리고 무엇보다 주식과 증권, 채권을 비롯한 다양한 금융상품이 경제를 좌우하게 된 역사적 변화에 민감했다. 1929년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강타한 자본주의의 역사적 위기는 비대해진 금융기관의 위력을 입증했다. 은행은 물론 증권거래소를 비롯한 금융기관은 자본 형성을 돕는 역할을 하는 데서 벗어나 그 자체 수익을 창출하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실체처럼 보이게 되었다(사실은 이자 수익이란 이윤 일부를 떼어낸 몫일 뿐이다). 노동자를 고용하여 상품을 생산하고 그를 판매하여 이윤을 얻는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경로와 돈이 스스로 불어나는 즉 이자를 통해 가치를 증식하는 자본주의의 기생적인 경로를 손쉽게 깔끔히 분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후자가 위력을 더해 갈 때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헤아릴 길이 없게 된다. 이를 간단히 삶의 현실이 더없이 추상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예술에 있어 아주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브레히트는 이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끔찍한 수수께끼로 변한 자본주의의 비밀을 파헤치고 그것을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우여곡절을 좌우하는 힘으로서 드러내는 기획에 착수하고자 했다. 즉 요즘의 말로 하자면 금융화된 자본주의를 폭로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재현하자는 것이었다. 그 핵심적인 대상은 선물거래소였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얼마 전 금융위기가 돌발했을 때 이를 재현하려는 숱한 영화들이,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고 상상 못 할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찰나적 시간의 요동에 자신을 내맡긴 금융업자들의 초상을 그리는 데 머물고 말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리얼리즘에 실패하고 고루한 도덕적 교훈극이 된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소설을 쓰려 미국에서 다시 오스트리아로 이곳저곳 여행을 하며 평생 선물시장에 관여했던 이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지만 누구에게서도 선물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뾰족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브레히트가 소설을 쓸 즈음인 1930년대와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우리는 마법과도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
글로벌 공급사슬이라는 수상한 이름(이는 국제 노동 분업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으로 진행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연결망은 더는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은 감춰져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처음부터 볼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드라마틱한 대결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드러내는 일은 오늘날 거의 쓸모가 없어 보일 지경이 되었다. 자본은 내 눈앞에 보이는 인격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지도 않거니와 글로벌 금융시장이 좌우하는 기업의 세계에선 그러한 자본가를 위한 자리도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쩌면 냉소적일 수도 있고 위악할 수도 있을 전시 제목인 <너의 실패는 나의 미래>에서 유장우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멘털리티(mentality)라고 부를 만한 것 속으로 진입한다. 신자유주의적 멘털리티의 중핵을 말하자면 아마 그것은 한없이 증폭된 불안(anxiety)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흔히 신자유주의라는 정치적 제도를 탑재한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개인의 자기책임화(self-responsibilization)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애 따르면 우리는 출생부터 죽음까지 우리 모두는 스스로 책임지고 경영해야 하는 인생이란 사업(enterprise)의 기업가(entrepreneur)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원치 않는 조언과 설득, 경고, 훈계를 지겨우리만치 들어왔다. 이제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 불안해 할 수밖에 없다.
좋았던 옛날처럼 우리는 간단히 요약할 수 있는 인생 궤도가 있다고 더는 믿을 수 없는 삶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안정적으로 제도화된 삶의 사회적 세계가 사라지는 광경을 보며 마침내 삶을 구속하는 갑옷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환호성을 지른 것이 신자유주의였다면, 또한 그것은 우리에게 끝없이 자신을 평가하고 측정하며 개선하도록 몰아붙이는 끔찍한 악몽 속으로 인도하기도 했다. 왜 당신은 자신을 향상시킬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않느냐고 다그치면서 말이다. 유장우는 여느 젊은 세대의 투자자들이 그러하듯 남들이 모두 하므로 나도 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한 불안감으로 주식 투자에 손을 댔다고 한다. 그리고 언제나 투자에 동반되는 일과에 그 역시 꼼짝없이 갇히게 되었다. 그것은 가치 변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강박적으로 소비하는 것이다. 증권가가 루머와 찌라시에 좌우되듯, 불안한 개인 암호화폐 투자자들 역시 자신의 투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것에 애면글면 집착하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일론 머스크의 발언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자율주행자동차 회사 경영자인 일론 머스크는 투기적 자본주의의 모든 측면을 압축하는 아이콘일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더는 경제학은 쓸모가 없어질 것이고, 그를 대신해 “일론 머스크 근접 가격(Elon Musk Proximity Pricing)”을 다루는 편람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 언급하기도 한다. 그가 무슨 발언을 하느냐에 따라 관련 기업의 주식가격이 널뛰는 것을 두고 언급한 것이다. 다시 시장에서의 가치는 풍문과 기대에 의해 좌우되는 듯한 환상이 법석을 떠는 것이다. 그러니 ‘테슬라’의 결제수단으로 비트코인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자 가격이 폭등한 것은 전연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너의 실패는 나의 미래>에서 유장우가 주시하는 것도 바로 동시대 자본주의의 의미심장한 증상이라 할 수 있을 언어의 괴사(壞死)이다. 일론 머스크의 허무맹랑한 말들, 어떤 의미도 실어나르지 않지만 그런데도 괴력(怪力)을 뿜어내는 말들에 대한 작가의 의구와 조소는 놀라운 것이다.
‘포스트-진실(post-truth)’ 시대에 접어들며 정처없는 말들에 대응하기 위한 조처로 등장한 ‘팩트-체크’가 무색하리만치, 머스크의 말은 숫제 팩트와 대조할 수도 없다. 그것은 현실에 준거하거나 대응하는 말들이 아니라 기대와 소망, 불안이 충전된, 시쳇말로 정동적인(affective) 부하(負荷)로 가득한 말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여전히 말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어떤 지시적 기능도 없고 어떤 소통적 역량도 품고 있지 않지만, ‘영향’을 가지는 신기한 말들의 폭주. 그리고 그러한 말들을 쏟아내는 자들을 위한 작위가 된 ‘인플루언서(influencer)’. 그리고 그런 말들은 세계를 둘러싼 경험과 인식을 눈곱만큼도 전달하지 않은 채 순식간에 휘발되고 만다. 그리고 그것은 꾸역꾸역 앞의 말들을 밀치고 자리를 차지하는 실시간의 ‘지금 여기’의 말들에 의해 효력이 정지되고 찰나에 휘발된다. 그러니까 언어는 초죽음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머스크의 언변이 상징하는 언어의 빈사(瀕死) 상태는 언어의 편에서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유장우가 캐묻고자 하는 것도 그것이다. 그는 헐값이 되어버린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것에 속수무책으로 압도되는 자들의 신경증에 의문을 품는다. 작가 스스로 그러한 신경증에 사로잡혔듯이 말이다. 불안한 자들의 피폐한 삶. 불안정(precarious) 노동이라고 우아하게 명명되었지만, 임금 소득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겐 피를 말리게 하는 단기간의 저임금 노동을 전전해야 하는 황폐한 처지를 가리키는 그 말은 드러내는 것보다는 숨기는 것이 많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노동을 전전하며 살아가야하는 청년 세대의 삶은, 동시에 그들의 심리적 진실로서 ‘불안’이라는 짐에 압도된다. 작가 스스로 심란히 토로하듯 전시 지원에 응모하고 입주작가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눈치를 살펴야 하듯이 말이다.
현실 앞에서 많은 이를 덮쳐 누르는 불안이라는 심리적 정동, 불안을 연료삼아 투기적 금융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 암호화폐 그리고 이를 지속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말들의 질주 그리고 이를 매개하는 기술적 장치이자 플랫폼인 인터넷 미디어는 신묘한 동맹을 맺는다. 유장우는 트위터에서 회자되는 말들, 유튜브에서 울려 퍼지는 거친 목소리들, 이를 뒷받침하고 승인하는 여러 기관의 잡다한 공식 문서들에서 추출한 말들을 극작가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극작가는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을 재현하는 드라마가 될 수 있도록 언어들에게 캐릭터를 부여한다. 그것은 다채널 설치 영상에서 식별하기 어렵고 또한 의중을 가늠하기도 어려운 말들을 통해 중계된다. 그러나 당연히 돋보이는 것은 그러한 말들을 입에 올리고 그런 말들에 비틀거리며 그런 말들에 일희일비하는 불안한 주체들의 초상이다.
그런 점에서 유장우의 특기는 다시 한번 발휘된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미학적 현상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그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동시대의 주체들이 현실을 어떻게 지각하고 경험하는지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가 특히 ‘주목(attention)’에 관심을 두며 작업한 <포커스 플레이스>(2019), <HSMR>(2019), <집중의 연대기>(2019)는 모두 산만과 주의의 변증법을 다룬 바 있다. 언제부터인가 병리화된 ‘산만함’(주의력결핍행동장애 ADHD: 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은, 모든 심리적 현상들을 다룰 때 그러하듯, 개인에게 증상의 책임을 들씌운다. 그러나 만연한 산만함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약리적 요법 그리고 산만함을 물리치고 주의를 끌기 위한 이미지와 언어의 광란적인 조작, 이 모두는 동시대 자본주의의 운동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고립된 개인의 주관적 경험의 현상학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에 머물지 않고 이를 극단적으로 추상화된 불투명한 현실을 재현하는 작업과 연결하고자 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이러한 용도의 작업을 위한 미학적 프로그램으로서 ‘인식적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를 제안한 바 있었다. 이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개인의 경험을 결정하는 보다 큰 사회적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를 통해 ‘경험’과 ‘인식’을 잇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시각예술에서 그러하다. 이를테면 근년 블록버스터 전시의 알파이자 오메가가 된 ‘몰입(immersive)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몰입이란 유장우가 극구 캐묻는 주목의 예술적 버전이다. 그것은 넋을 잃게 하는 스펙터클한 이미지와 사운드에 홀려버리는 것이다. 이는 거의 어떤 작품에도 주목하지 못한 채 산만하게 전시장을 누비는 관객의 태도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순수한 감각적 충격만을 쏟아붓는 이미지의 장관에 맞서 어떻게 비판적인 이미지를 생산할 것인가.
유장우는 이러한 물음에 답하려는 한국 동시대 미술의 드문 작가일 것이다. 그는 우리의 자명한 감각적인 경험,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비롯되는 자율적인 감각활동이라는 것이 얼마나 타율적인 것인가를 집요하게 따진다. 비록 그가 그러한 감각작용의 생산과 소비를 재연하는 데 머물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지라도 그가 답파한 미술적 실천의 전략은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비판적인 이미지를 생산하기 위하여 그가 기울인 노고는 그래서 브레히트를 떠올리게 한다. 더없이 불투명하게 멀어져 가는 세계에서 오직 고립된 개인의 감각적인 경험을 둘러싼 아우성만이 난무할 때, 가상현실이니 증강현실이니 하는 이름으로 현실을 전연 담지 않는 이미지가 리얼리즘을 구가하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 때, 유장우의 탐색은 바로 그러한 추상적인 세계와 주관적인 현상학적인 경험을 잇는 선을 지속적으로 긋는 것이다.
감각적 경험만이 과부하된 상태일 뿐 그것이 인식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되는 미적 경험의 상태를 가리켜, 포렌식아키텍처(Forensic Architecture)를 이끄는 에얄 와이즈만Eyal Weizman은 하이퍼감각hyperaesthesia이라 칭한다. 그것은 감각작용(sensation)과 의미작용(making sense)이 분리되고 후자가 마비되어버린 오늘의 미적 경험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유장우의 작업이 처한 지점도 여기일 것이다. 그는 감각작용과 의미작용을 연결하는 가교를 놓는 일을 자신의 미적 실천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