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장우 개인전 <소진되는 몸짓>
장제형
장제형
근대 사회에서 모든 노동은 목적합리성(막스 베버)의 지배하에 놓여있다. 마르크스가 이미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노동의 “소외”를 언급한 이래 모든 것을 목적 하에 수단으로 도구화시키는 이러한 합리성은 베버의 제자 루카치에게서 “사물화(Verdinglichung; reification)”된 의식으로, 마르쿠제에게는 “1차원적 인간”으로, 아도르노에게는 “관리된 사회”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고도의 규율 사회 속에서 몸을 통제하는 생체 권력의 미시적 차원은 일상의 구석구석을 지배한다.
프로그래머, 비서, 큐레이터, 마케터, 그리고 요리사라는 직업군과 그들의 활동에 각기 대응하는 5장의 이미지로 구성된 <불만연구>는 마치 스텐리 큐브릭의 <2001년 오디세이>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듯한 분위기를 공통 배경으로 삼는다. 어두침침한 분위기 속 일사분란하게 반복되는 기하학적 격자무늬로 이루어진 배경은 등장인물들이 지닌 어두침침한 인상과 더불어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예견하는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인 듯하다. 고도의 기술 발전이 유토피아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은 이미 환상이 된지 오래이다. 이러한 디스토피아에서 가장 먼저 통제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몸과 그 움직임이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성이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차원이란 그 지극한 개별성과 우연성, 돌발성으로 말미암아 결코 사전에 합리적으로 예측하고 통제 가능한 차원을 넘어선다. 각기 등장인물들의 규율된 직업의 규범이 지니는 차원은 그 색조만큼이나 우울하고, 그 배경선들 만큼이나 균질한 질서로 꽉 잡혀있다. 그러나 동시에 꽤 오랜 시간 속에 노출된 이들의 직업 활동은 이러한 예측가능하고 목적과 전략 지향적인 요청의 꽉 짜여진 통제의 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랜덤이자 거의 카오스적인 것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 어떤 행위도 동일하게 반복될 수 없고, 그 어떤 몸짓도 계측 가능한 수식으로 남김없이 환원될 수 없으며, 그 어떤 실천도 목적합리적인 도구화의 논리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다.
이 다섯 직업군들의 행위는 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을 지니고 있으며, 한 행위자의 몸짓은 자기 스스로도 결코 동일하게 반복할 수 없다. 직업 규율에 의거한 동일성은 그 실천 속의 차이산출을 통해 의문에 처해진다. 개별적이고 우발적인 이들 몸짓의 흔적은 모눈지의 희미한 격자선들보다 더욱 굵직하고 선명하며 촘촘하다. 그러므로 이들 직업인들에게 잠재한 ‘불만’이란 이 작품이라는 ‘연구’ 속에서 – 극복까지는 아니더라도 – 그 문제제기의 계기를 확보한다.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지각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보다 대상을 인식 및 지각 가능케 하는 조건을 검토해야 한다는 요청은 칸트 이래로 ‘초월적 tranzendental’이라는 이름아래 제기되어 왔다. 인식 이전에 인식을 가능케 하는 그 토대로서의 조건에 대해서 반추해야 한다는 이러한 기본 요청은 반성(Reflexion; reflection)이라는 이름으로 지성사에 등재되어 있다. 즉,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인식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세계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선회의 방법론>은 지구본으로 표현된 이 세계를 ‘선회’시키기 위한 나름의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 인물들을 전경화시키고 있다는 환유적이고 또한 반성적이다. 이는 묘한 시도이다. 5분 남짓의 시간동안 비춰지는 등장인물들과 그 행동의 모양새는 자못 기이하다. 처음에는 마치 세계사에 대한 다큐멘터리의 시작과 같은 인상을 주다가 1분 22초경부터는 마치 에로 영화의 장면과 같은 분위기로 급전된다. 그렇다면 이들 남녀가 행하는 ‘성애’의 대상은 무엇일까? 바로 지구의로 축약된 세계이다. 이들은 세계와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가? 물론 자신의 몸으로 나눈다.
그런데 이 몸이란 동시에 경계에 놓여있는 몸이다. 혀는 전형적으로 경계선상에 놓여있는 살이다. 한 편으로 혀는 “입 속의 검은 잎”(기형도)으로서 몸에 내재적이다. 다른 한 편으로 혀는 세계와 인간을 포함한 외부 타자와 만나게 되는 – 그것도 아주 은밀하지만 동시에 전면적으로 만나게 되는, 일종의 고백의 – 매개체이기다. (가령 키스는 타자와 전면적인 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고백이자 그 개시이며, 또한 이는 당사자들에게 일종의 계시이다.)
이러한 혀의 경계적 속성은 언어가 지닌 양가적 특성에 대응하기도 한다. 이는 무엇보다 혀와 말 사이의 필수불가결한 연결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혀 없이 말이란 불가능하다. 혀는 목소리라는 청각이미지로서 기표와 더불어 그 정신적 내용으로서 기의를 동시에 현실화시키는 물질적 매개체이다. 혀는 몸의 내재성과 외재성, 자아와 타자, 말의 기표가 기의가 서로 교차하고 침투하는 십자로의 정 중앙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인류는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 동인에 대해 고민해 왔다. 그것은 사랑(예수)일 수도, 물질적 실천(마르크스)일 수도, 혹은 언어(20세기 언어철학)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과 몸의 실천과 언어 이 모든 것들과 공통으로 결부되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혀이다. 그러므로 지구본으로 축약된 이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그것이 사랑이건, 몸의 움직임이건, 혹은 말이건 간에 바로 혀로 집약되어 표현된다.
그런데 이 지구본은 움직이는 듯 하면서도 또한 속 시원히 움직이지도 않은 채 서로간의 혀의 힘에 의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듯이 보인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소리는 사랑의 설교도, 혁명의 구호도,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체현하는 설득과 논증의 말도 아닌, 그저 핥는 소리와 지구본의 삐걱거림과 같은 소음 정도이다. 고로 세계가 선회한다는 것은 이 모든 거창한 것들보다 그저 혀가 지닌 한갓 물질적 차원이 소산에 불과하며, 그 양상이란 기실 혀 운동의 소산으로서 한낱 소음 이상이 아니라는 것일까?
“의례 없는 종교는 없다.” – 이는 수행성 이론의 기본 테제라 할 것이다. 교회에서는 눈을 감고 손을 모으며, 성당에서는 서고 앉기를 반복하며, 사찰에서는 절을 한다. 믿음이라는 정신적, 정서적 차원은 항시 그 구성원들의 육체적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의례 행위를 필수적인 구성부분으로 삼는다. 바로 이러한 차원을 통해 종교는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재생산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포이어바흐의 종교비판은 바로 종교에 대한 인간의 수행적 실천 속에서 또 다른 표현을 얻게 되며, 뒤러의 소묘 <기도하는 손>는 바로 이러한 제례가 포괄하는 제반 수행적 행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환유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가 그러하듯 종교가 지닌 이러한 물질적, 육체적 차원은 대개 은폐되어 있다. 혹은 사람들은 이를 뻔히 알면서도 마치 그게 아니라는 듯 짐짓 점잔을 떤다. 예술의 기능을 허위의식에 대한 폭로라고 하건, 현실에 대한 낯설게 하기 라고 하건 간에, <기도>는 바로 이 의례 행위가 지니고 있는 수행적 성격을 가시화시킴으로써 믿음에 대한 기존의 속설을 폭로하고 낯설게 만든다. 화면 속 여인은 제목에 걸맞게 경건한 몸가짐으로 신과 자신 간의 고유한 만남의 순간 속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앞에 불쑥 튀어나와 맞잡은 두 손은 그 흔들림만큼이나 저 만남의 경건함을 동요하게 만드는 듯하며, 불끈 쥔 주먹은 그 우악스러움만큼이나 저 순종심에 거역하는 듯하다. 이 두 손이 여인의 것인지, 혹은 다른 이에 속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이 기도라는 화면 프레임 속 종교적 실천 속, 요동치는 시간성과 둔탁한 육체성이라는 교란 요소로 말미암아 모종의 균열이 가시화된다. 그럼으로써 저 고결한 정신적 차원이 기실 만들어진 인공물에 불과하다는 점 또한 분명히 감지된다. 그렇다면 뒤러의 저 경건한 ‘기도하는 손’ 또한 이 종교라는 인위적이고 구성적인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매개체라는 인식이 가능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또한 유장우의 기도하는 손과 뒤러의 기도하는 손 간에는 그 시간적, 질료적, 매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주제의식상으로 모종의 연속성이 게재되어 있다 할 것이다. 양자에게서 공통적으로 가시화된 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유를 제작하는 인간(homo faber)으로 묶어주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바로 그 부분이며, 이는 종교와 믿음의 ‘제작’에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굳이 레싱의 <라오콘>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미술은 공간과 관련되고 문학은 시간과 관련된다는 점은 상식일 터이다. 문학이란 언어를 주요한 매체로 삼고, 언어의 기원은 루소에게서 그러했듯 새들이 지저귀는 노래와 같은 차원에 놓여있는 것이기에, 노래란 당연히 시간성과 관련될 것이며, 그에 결부되는 주요 감각은 바로 청각일 터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하기만 할까? 가령 노래방서 노래를 부를 때 지배적으로 관련되는 인간의 오감은 과연 어디인가? 물론 노래 부르기가 청각과 관련된다는 점은 당연지사이다. 그러나 가사를 익히고 다른 이들의 반응을 봐야 – 혹은 무시해야 – 한다는 점에서 시각과도 관련되고, 탬버린을 두들기며 기분 내키면 춤도 춘다는 점에서 촉각과 연결된다. 힘껏 부르다 시원한 맥주 한 잔 곁들인다는 점에서 미각도 건드리며, 또한 호흡을 조절해야만 하니 후각이 빠질 수 없다.
<99개의 풍선>은 바로 노래 부르기 행위가 지니는 이러한 복합감각적인 상호매체적인 성격을 전경화시키고 있는 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작품이 지니고 있는 반성적인 차원에 의해 가능케 된다. 먼저 카메라는 무엇을 보는가? 노래기계의 가사와 화면을 본다. 그런데 이 카메라는 또한 보여지는 대상이기도 하다. 누가 카메라를 보는가? 바로 이 작품 <99개의 풍선>을 관람하는 사람이 본다. 그렇다면 관람객은 카메라가 보는 것(1차 관찰)을 본다는 점에서 2차 관찰자이며, 보는 것을 본다는 점에서 반성적 관찰자이다. 그러므로 작품 <99개의 풍선>이라는 프레임 속에서는 1차 관찰과 반성적 2차 관찰이 상호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성적 관찰 속에 가시화되는 바란 바로 상기 복합감각적인 실현의 사례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반성적 시각 아래서 카메라가 지닌 상호매체적 성격 또한 가시화된다. 이 가사를 보고 부르는 사람의 혀에는 동시에 또 다른 보는 눈, 즉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다. 여기에서 혀는 노래를 부른다는 점에서 청각, 카메라의 담지자란 점에서 시각, 이 기계와 직접적으로 지고 있다는 점에서 촉각, 그 맛 아닌 맛을 불가피하게 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미각, 그리고 코와 더불어 열려있는 입을 통한 호흡에 관여하게 되므로 후각과도 또한 관련된다. 이러한 점에서 이 혀는 모든 오감이 만나는 결절점이 된다. 이 점에서 혀가 지니는 경계적인 성격이 또한 복합감각적인 차원에서 극적으로 부각된다.
이러한 혀의 기능은 카메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카메라는 보는 카메라(시각)이며, 노래 부르며(청각), 흔들리며(촉각), 혀를 맛보며(미각), 입과 함께 숨 쉰다(후각)는 점에서 또한 혀처럼 오감을 공유한다. 이 점에서 혀라는 유기체와 카메라 기계라는 무기체가 기실 다르지가 않게 되며, 오감이 상호 교차하는 와중에 이들 간의 경계는 사실상 무화되는 정도에까지 이른다.
<믿음과 현실>은 본 전시의 흐름을 총망라하며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차원에 놓여있다 하겠다. 먼저 사전에 제시되어 있는 ‘현실’로서의 3차원 공간은 점선면으로서의 0에서 2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앞서 <불만연구>의 배경을 더욱 추상화시킨 기하학적 공간의 형태로 제공된다. 이렇게 점과 선과 면이라는 기본 요소로 삼아 이를 숫자와 양이라는 기본 단위로 환원시킬 수 있는 이러한 유클리드 기하학적 공간이라는 ‘현실’을 어떻게 하면 ‘인간적’인 ‘현실’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이 인간이란 기존 근대적 계몽으로부터 비롯된 지성과 이성, 그리고 절대정신으로 화한 합리적 인간이 결코 아니라, 바로 그 합리성이 포섭하고자 했으나 완전히 성공하지도 못한 저 피안, 즉 바로 몸의 차원을 활성화시키는 인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그녀가 이러한 합리적인 차원을 마냥 도외시하고 배제함으로써 모종의 비합리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몽매의 차원으로 급전직하하는 것도 아니다. 이 인간은 사전에 전제된 기하학 공간 속 선들을 따르는 데 주저하지 않으나, 동시에 이들은 이를 또한 넘어서기도 한다. 어떻게 넘어서는가? 첫째, 먼저 주어진 경계를 홀가분히 넘어선다. 둘째, 시간성의 차원에서 그들의 몸짓이 지닌 우연성과 우발성, 비환원적 개별성이 하나의 일어남, 사건이 됨으로써 그러하다. 셋째, 이들의 몸은 숨 쉬고 땀 흘리는 몸이다. 이들 몸의 시간성으로부터 발원되는 공기의 발산과 액체의 흐름이라는 물질성과 시간성의 차원은 명료한 의미 전달이 불가능한 일종의 신음과 같은 불가해한 청각적 차원과 함께 동시적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물질성과 육체성이 시간성의 함수 속에서 어우러지는 이 무대 아닌 무대의 현존과 즉흥성 속에서 모종의 사건의 일어남 Ereignis이 경험 가능한 그 무엇으로 화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몸 수행 실천을 통해 비롯된 ‘사건’이란 이러한 차원에서 결코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동시에 자신의 현존을 스마트폰을 통해 재차 기술복제함으로써 자신의 수행적 실천을 반성적으로 영유하는 2차 관찰자가 된다. 이러한 수행자가 동시에 수용자가 되기도 하는 이러한 반성적 자기관찰은 동시적으로 현존하는 관객들의 2차 관찰과 어우러져 이 육체적 수행적 실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케 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이러한 자기관찰을 통한 새로운 인식을 토대로 새로운 수행의 차원이 또한 싹틀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실천은 무한한 맥락 속에 놓여있다 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이름’은 <소진되는 몸짓>이다. 그러나 과연 몸짓이 소진될 수 있을까? 앞서 보았듯 몸짓은 그 우발성과 개별성, 돌발성으로 말미암아 결코 소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소진되는” 몸짓이라 말할까? 이 이름붙이기의 발화는 기실 지칭하는 행위를 통해 그 지시하는 바를 뒤집는 역할을 하는 하나의 아이러니적 몸짓이라 할 것이다. 그간 망각되어 왔던 몸짓이 자못 소진되는 제스처를 취함으로서 그 자신의 소진 불가능성과 무한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듯이 말이다.